아버지의 퇴직

2009. 4. 6. 16:14끄적끄적

내 아버지는 주택관리사로 모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수업시간에 발표할 내용이 있어서 준비하려고 일찍 집에 들어왔더니 평소 오후 6시가 되어야 퇴근하시는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지난 주말에 서울까지 장거리 운전을 하셔서 피로 때문에 일찍 들어오셨나보다 싶었는데 어디선가 챙겨오신 짐을 정리하시는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 두셨다. 누가 그만 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도 들었고 젊은 사람들한테 자리를 줘야 하지 않겠냐 하시며 올해까지만 일하시겠다고 종종 말씀해오신 터라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그만 두셔서 무슨 사정이 있으신가 했는데..

아파트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결재를 통해 결정이 된다고 한다. 결재를 요청하며 올라오는 서류 중에는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닌,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은밀히 진행되어 일부 사업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들이 있다. 아버지의 결정은 매우 중요하다. 수천에서 수억, 수십억이 왔다갔다 하는 서류들이다.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일들이니 가볍게 생각하고 도장 한번 찍어주면 그만인 일일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옳지 못한 일이라 생각하여 지난 주에 거절했던 서류가 오늘 다시 올라왔고 아버지는 결국 퇴직에 도장을 찍으셨다. 

" 어차피 그만 두려고 했던 것이 시일이 조금 앞당겨진 것 뿐이니 아무렇지 않다. 걱정 말아라. "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한동안 멍했다.
이것은 아버지의 퇴직에 대한 충격이거나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부끄러운 길은 가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고집과 정직함에 대한 감동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아들임에 대한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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